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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호

미주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로 부르는 김 호

김호김호를 독립운동의 큰 인물, 위대한 지도자로 표현한다.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자립형 민족지도자라고 부른다. 스스로 경제적 자립을 일구었고, 미주한인의 권익보호에 앞장을 섰다. 무엇보다도 대한인국민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한평생에 걸쳐서 했다. 몸소 실천하는 민족의 지도자였고, 누구나 비교할 수 없는 지도자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한인사회를 위해서 가장 많은 봉사를 했다. 김호는 1889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한성중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임명받아 배재학당, 이화학당에서 가르치면서 영어를 배웠다. 1912년 11월에 미국 유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상해에서 체류하다가 1914년 7월2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을 했다. 이때부터 나라 잃은 조국을 생각하면서 재미한인사회의 단합과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3.1만세운동 후 김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대표 사명을 띠고 미국 동서를 다니면서 독립운동 조직과 모금에 나섰다. 그의 삶의 새로운 변화는 1920년 5월 중가주 리들리에와서 김형순과 김브라더스라는 과일회사를 설립하고 30년간 농업에 종사하는 한편 한시도 쉬지않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중가주 김브라더스는 크게 성공을 했다. 중가주 한인사회가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도 김호의 노력 때문이었다. 무엇보다고 1936년부터 대한인국민회 부흥운동에 참가하고, 1937년 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초대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이 되었다. 이때부터 1945년 8월15일 광복의 날까지 미주 독립운동에 김호는 중심인물이 된다. 1957년 리들리에서 한인재단을 창설하고 유학생에는 장학금을 그리고 김원용이 「재미한인50년사」를 쓰도록 모든 후원을 맡았다. 1962년 한인센터를 만들었고, 오늘 한인회의 모체가 되고 한인회관 건물을 사는 종자돈도 김호가 냈다. 2006년에는 김호의 이름 딴 Charles Kim 초등학교가 로스앤젤리스에 세워지는 자랑스럽고, 역사적인 일이 이루어졌다. 부인 이숙종과의 사이에 아들 경한, 딸 한숙이있다. 김호는 2002년 리들리에서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을 했다.

성명 : 김 호 (金 乎, Charles Kim)
훈격(연도) : 독립장 (1997)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서울
생존기간 : 1884. 5.25 ~ 1968. 1. 5

서울 사람이다. 1914년 이래 대한인국민회 등 미주지역 한인단체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김호는 망국의 현실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세우고 1912년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1914년 상해에서 미국으로 온 후 노동에 종사하며 대한인국민회에 참가하여 재미 한인사회의 규합에 힘을 쏟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미주지역에서는 이에 호응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때 샌프란시스코 국민회중앙총회의 특파위원이 되어 미주 서부지역을 2개월 동안 순회하면서 10,000달러 이상의 독립자금을 수집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무렵 그는 독립 달성을 위해서 국제적 외교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9년 12월 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사회개진당을 조직했다. 노동사회개진당은 파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외교활동을 벌이던 조소앙을 후원하기 위해 조직된 독립운동 후원단체로, 김호는 노동사회개진당의 선포문을 낭독하는 등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의 재정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일환으로 1920년 회사를 설립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공으로 대일투쟁의 전선이 중국 관내지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독립운동세력들이 좌우의 이념을 초월한 통일전선을 모색하고 있을 때, 그를 비롯한 미주지역 국민회 인사들은 대한독립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통일전선에 참가했다. 한편 1936년 로스앤젤리스에서 한인사회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국민회 리들리지방회를 재건할 때, 대의원에 피선되어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발전에 노력했다. 그는 1937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과 1949년에도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1941년 4월 20일 미국 하와이 호놀롤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될때 김호는 한시대, 송종익 등과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결성에 적극 참가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호놀롤루에 위원회의 의사부를, 로스앤젤리스에는 집행부를 두었다. 이때 그는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런 가운데 1941년말 일제가 하와이를 기습 침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호 등은 조국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력 양성을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1941년 1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한인국방군 편성계획을 미육군사령부에 제출하고, 로스앤젤리스에 한인국방경위대로서 맹호군을 창설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계획을 중경의 임시정부에 알려 1942년 2월 정식 인준을 받아낼 수 있었다. 1942년 5월 태평양전쟁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독립 달성의 구체적 방도를 모색하고자, 중경의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중국에 특파원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김호는 중경특파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김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장으로 1942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을 기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한 일환으로 미국 당국과 협의하여 로스앤젤리스 시청에 헌기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한국의 국기가 1910년 망국 이후 32년만에 외국 관청에 게양될 수 있었다. 특히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일제의 패색이 짙어가는 가운데 이들은 종전 후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하여 국제외교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임시정부도 그와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1944년 8월 종래 구미외교위원부를 주미외무위원회로 바꾸고, 같은 해 11월 이승만, 김원용, 김호 등을 위원으로 선임했다. 1945년 3월 8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연합국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의하고, 재미 인사 가운데 김호, 한시대, 송헌주 등을 대표로 선임했다. 김호는 광복 후 1945년 10월 재미한족국내파견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하여, 1946년 12월 남한 과도입법의원으로 활약했다. 다시 미국으로 와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호M1

김호 가족. 왼쪽부터 손자 안성주, 딸 안한숙, 부인 이숙종, 김호, 손녀 뱃시(1964년)

김호M2

로스앤젤리스의 찰스 김(김호) 초등학교 명명식 후 참석한 한인들이 학교 앞에 섰다. (2006년 10월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