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서 식당으로 첫 성공, 독립금 낸 김 경
김 경의 국권회복운동은 바로 독립기금을 내면서 참여 한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로 상해 임시정부와 김구 주석의 의열투쟁을 위해서 재정적인 지원에 나섰다.
김 경이 미국에 도착한 것은 17세인 1905년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 도착했고 처음 로스앤젤리스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몇년간 살았다. 그리고 1910년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에 설립한 소년병학교에 입학했다. 김 경은 낮이면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목총을 가지고 고된 군사훈련을 받았다.
배고픔과 고달품을 이겨야했고 미국에서 꼭 성공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이때 다졌다. 건축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2년경 시카고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몇년이 지난 1917년, 김 경은 식당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다운타운에 3백석의 카프테리아를 오픈했다. 그리고 로렌스, 디버시 등에서 모두 5개의 식당을 소유할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시카고에서 가장 성공한 초기이민자가 바로 김 경이었다.
김 경은 1923년에는 시카고한인교회의 창립 발기인중 한명으로 교회 건축을 도왔다. 그는 특별히 사람을 좋아했고 성품이 부드러웠다. 시카고를 찾는 손님들이 항상 식당을 찾았다. 독립지사인 이승만, 서재필, 안창호, 조병옥 등이 다녀갔다. 물론 후원금을 위해서 였다.
백범 김구 자서전인 「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시카고에 있는 김 경은 그곳 공동회에서 모은 것이라며 1920년대말 집세나 하라고 미화 2백달러를 보내어 왔다. 당시 임시정부의 형편으로는 이것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돈도 돈이려니와 동포들의 정성이 고마웠다. 김 경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김 경은 1928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임 벳시 여사와 결혼했다. 식당사업으로는 성공했지만 193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진열관을 차렸다가 큰 손실을 보았다. 그리고 1938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1966년 7월15일 78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삶을 마쳤다. 김 경과 임 벳시 사이에 두아들 유진과 주름을 두었다.
성명 : 김 경
훈격(연도) : 애국장 (1997)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순천
생존기간 : 1888. 1.28 ~ 1966. 7.15
평안남도 순천 사람이다.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시카고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04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식당을 경영하던 김 경은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1910년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자 이에 적극 참가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미주 지역 한인사회의 결집을 도모하면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지원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20년대 말 임시정부 주석 김구로부터 임시정부가 재정상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는 편지를 받고, 시카고에 있는 동포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는 한편 자금모집에 앞장 섰다.
그리하여 그는 공동회에서 모은 미화 200달러를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은 지역 특성상 교민사회의 자치 및 단합을 도모하는 한편 주로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1934년 8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재무부주미제6행서 재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재미교포로부터 징수되는 인구세와 애국의연금을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송금하는 등 지속적으로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했다. 정부는 1997년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