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목사업으로 성공, 평생 부부가 독립기금 낸 김형순
김형순은 첫 하와이 이민선 통역관으로 미국에 도착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서 독립운동에 앞장을 섰다. 1920년 중가주 리들리에서 묘목원, 과수원, 과일포장회사를 경영하며 한인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재정담당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평생 사업으로 번 돈을 부인 한(김)덕세와 함께 독립운동 기금으로 냈다. 김형순은 1886년 5월4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인천으로 갔고, 미국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영어와 서양학문을 배웠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인천세관직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수민원의 통역관시험에 합격하고 첫 이민선을 타고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1909년에 귀국을 했고 이화학당 출신의 한덕세와 결혼, 나라 잃은 만국의 한을 갖고 1913년 다시 미국으로 왔다. 부인 한덕세와 자녀들이 미국으로 와서 합류한 후 리들리로 와서 부부가 함께 묘목회사를 설립했다. 한덕세는 이화학당 시절 수학을 가르친 김호가 미국에 온 것을 알고는 초빙, 1921년에는 김형순과 김브라더스라는 과일회사를 차리도록 했다. 이 회사는 털이 없는 복숭아를 개발하고 사업체는 크게 성공했다. 김형순은 처음에는 이승만 박사의 재정후원자로 독립운동을 도왔으나 이 박사가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 후 결별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동업자인 김호와 함께 대한인국민회를 위해서 독립자금을 댔다. 1938년 제퍼슨가의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관을 건립할 때에도 거액을 냈다. 1941년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재정위원장을 맡아서 큰 사위 김용중의 워싱턴DC 외교업무를 적극 후원했다. 한때 맏딸 메리가 김용중과 결혼하기 전에는 이승만 박사와 결혼 이야기가 오갔던 일화가 남아있다. 해방 후 동업자 김호와 10만달러를 들여서 한인재단을 만들어 유학생에 장학금을 지원했다. 오늘의 로스앤젤리스 한인회관을 짖기전 한인센터에도 기금을 냈다. 로스앤젤리스에서 1977년 1월25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성명 : 김형순 (金衡珣, Harry S. Kim)
훈격(연도) : 애국장(2011)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경상남도 통영
생존기간 : 1886. 5. 4 ~ 1977. 1. 25
1914년 3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에 가입했으며, 1922년 다뉴바지방회 실업부원으로 활동했다. 1930년 3월 국내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결성된 중가주대한인공동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11월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구미위원부 후원 활동을 전개했고, 1933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주한인연합회 제2차 통상회에 나성동지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1937년 1월 재건한 대한인국민회 제1차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된 데 이어, 1938년 12월 중가주지방회지방대표로 선임되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중가주지방회 대표원, 선전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뿐만 아니라 김형순은 1914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총5,337달러의 독립금을 지원했다.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