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김현구

국민회와 언론 통해서 독립운동에 나선 김현구

김현구김현구는 1909년 4월 미국에 왔다.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는 언론과 외교분야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1921년 1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워싱턴DC, 뉴욕과 로스앤젤리스 그리고 하와이 지역을 오가며 평생 나라를 찾기 위해서 한 삶을 산 애국지사이다. 오하이오주립대학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독립운동은 글과 말로서 미국사회에대한독립을 알리는데 앞장을 섰다. 1919년 1월 신한민보 주필을 그리고 1927년 국민보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김현구는 뉴욕지역에서 일제의 잔학한 행위를 알리고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독립운동의 길에 나선 것이다. 이승만 박사와는 정치노선을 달리했고, 「우남 이승만전」이라는 비판적인 저서를 냈다.

김현구의 맏아들 듀이 김(한국이름 김훙우)은 하와이 교육계에서 가장 성공, 커뮤니티칼리지 총장을 지냈다. 그리고 하와이주립대학 학장에 올랐다. 그리고 듀이 김의 아들인 김현구의 손자 제롬 김(김한식)은 한국에 본부를둔 국제기구인 IVI(국제백신연구소)의 첫 한국계 수장이 되었다. 그는 한국에 부임후 “내 조부께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김현구는 1998년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을 했다.

성명 : 김현구 (Henry Cu Kim)
훈격(연도) : 애국장 (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충청북도 옥천
생존기간 : 1889 ~ 1967

충청북도 옥천 사람이다. 면암 최익현 제자로 양정, 배재, 보성중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1906 ~ 7년경 계몽운동단체인 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망명 출국하여 중국 지역을 다니다가 1909년 4월 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했다. 1910년 가을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 지역에 설립한 군사사관학교인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졸업 후 소년병학교 중견 간부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그 뒤 1918년 6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대학에서 정치와 철학을 공부하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9년 1월에는 북미 대한인국민회의 임명을 받아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주필이 되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1월 25일부터 오하이오 콜럼버스대학의 한인학생회에서 발행한 「소년한국(Young Korea)」을 집필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선전했다.

1920년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법무원으로 선출되었으며, 4월에는 학생총회 결성발기자회에 샌프란시스코지방 학생대표로 참석하여 미주 각 지방에 산재한 한인 학생과 학생회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미학생월보」 편집인이 되어 미주 한인 유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단합에 정열을 쏟았다. 한편, 1918년 7월 박용만이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을 목적으로 조직한 갈리히연합회에 발기인으로 참석했다. 1919년 3월 국내와 원동의 항일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할 목적으로 박용만이 결성한 대조선독립단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했다. 또한 5월 박용만이 중국 북경으로 가 원동의 군사단체들과 연락하여 1921년 4월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회를 개최하자, 하와이 대조선독립단 대표로 통첩문에 참여하는 등 군사통일회의 운동자금을 적극 조달·후원했다. 그 후 1927년 4월 워싱턴에 본부를 둔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본인 명의로 ‘독립운동 8개년계획’을 발표하는 등 1929년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29년 11월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에 입단하여 서기와 재무 및 기관지 「국민보」 주필로 활동하던 그는 1931년 1월 이승만 중심의 독재체제를 몰아내고 민족운동에 전념할 하와이 한인단체를 건설하고자 투쟁했다. 특히 이승만이 1925년부터 추진해 오던 동지촌 건설의 실패와 동지식산주식회사 몰락으로 동지회가 재정난에 빠져 교회재산과 교민단의 회관을 매각하여 이에 충당하려고 하였을 때, 김원용 등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저지했다. 이로 인해 이승만으로부터 테러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1932년 1월 이승만 일파를 축출하고 교민단을 변경하여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여 하와이한인단체의 통합기구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우는 등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같은 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구의 한인애국단 특무공작을 후원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결성된 하와이애국단에 가입하여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의 거사를 적극 후원하여 김 구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33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임명으로 다시 대한인국민회 서기와 재무, 그리고 동 기관지인 「국민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한인 교포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노력했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陣線)과 민족전선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간의 전쟁이 고조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북미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했다.

결의에 따라 1941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가 설치되자,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힘있게 추진했다.

그 뒤 1944년 10월 로스앤젤리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 단체가 개최한 대표회에서 구미외교위원부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광복 후인 1951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자서전』을 비롯해 이른바 ‘삼만전’으로 알려진 『우남 이승만전』, 『우성 박용만전』, 『검은 정순만전』 등을 저술하여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기여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인 김현구(뒷줄 오른쪽). 하와 이에서 열린 대한부인구제회 총회에 참석했다. (1942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인 김현구(뒷줄 오른쪽). 하와이에서 열린 대한부인구제회 총회에 참석했다. (194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