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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세

세브란스의대 나온 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 김창세

김창세김창세는 한국 재림교회(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초기 지도자였다. 재림교회 소학교와 일본 유학후 세브란스의과대학을 졸업했다. 미국에 와서는 Johns Hopkins에서 세균학 박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순안 의명학교 교수, 세브란스 교수를 역임했다. 도산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의 여동생 이신실(정실)과 결혼했다. 도산의 동서로 안창호의 건강을 돌보았다. 도산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를 했다. 민족선각자로서 건강교육에 있어서 중국, 한국 그리고 미국에서 폭을 넓히면서 활동을 했다.

김창세는 어려서부터 많은 곳을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용강에서 출생한후 평양과 일본 고베, 동경 등을 오가면서 학교를 다녔다. 세브란스의대를 나온 뒤 고향에서 외과병원을 개업했다. 그는 언어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1920년 흥사단에 입단, 단우번호는 121번이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의사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미국에 와서 다시 의과공부를 했지만 일찍 삶을 마쳤다. 그는 1934년 뉴욕에서 자살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으로는 장남 리차드 김 목사와 차남 아더 김이 있다.

성명 : 김창세 (金昌世)
훈격(연도) : 건국포장 (2001)
운동계열 : 대한적십자회
출생지 : 평안남도 용강
생존기간 : 1893. 2.22 ~ 1934. 3.15

평안남도 용강 사람이다. 도산 안창호 동서로 안식교인이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1916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안식교에서 경영하는 적십자의원에서 근무했고, 프랑스에 다녀오기도 했다. 1919년 7월 대한적십자회 중심인물로 상해에서 대원 모집과 부상자 구호활동 등을 전개했다. 같은 해 11월 상해임시정부 평남 용강군 조사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 3월에는 적십자구호원양성소 교사로 근무했다. 북경에서 개최한 원동서양선교회 의원대회에 참석했다. 1920년 5월 18일부터 11월 10일까지 상해 임시정부 임시공채관리국 공채모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21년 11월에는 대한적십자총회에서 감사로 선임되었다. 한편, 1920년 3월 11일 김용정·전재순·이석 등과 함께 흥사단에 입단하여 단원으로서 안창호를 보좌했다. 1925년 국내로 들어와 1927년까지 수양동우회 의사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32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대한인국민회 및 서재필 등과 협력하여 윤봉길 의거 후 상해에서 피체된 안창호의 석방을 위해 미국정부 및 미국 상원의원 보라와 골드버그, 기독교연방회의(The Federal Council of Churches)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활동을 전개했다. 정부는 200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창세와 부인 이신실과 가족들. 이신실은 도산 안창호 부인 이혜련의 여동생이다.

김창세와 부인 이신실과 가족들. 이신실은 도산 안창호 부인 이혜련의 여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