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빈(춘하)

3.1만세운동 후 임시정부 비밀문서 연락맡은 김창빈(춘하)

김창빈김창빈은 1919년 3월1일 평양 만세운동에 앞장을 섰다. 그리고 1920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비밀문서를 13도에 연락하는 책임을 맡았다. 검거령 후에 중국으로 피신, 옥중생활을 면했다. 상해를 거쳐 1924년 로스앤젤리스로 망명을 왔다. 남가주에서는 이름은 김춘하로 바꾸어 사용했다. 숭실중학교를 나왔고 신우학교 선생으로 근무하는 중에 3.1운동이 일어났다.

길선주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장대현장로교회에 애국시민이 운집했다. 이때 교사인 김창빈은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그후 상해 임시정부는 국내로 보내는 비밀문서를 계란박스에 넣어서 평양으로 보내왔고 운송부 비밀요원을 맡았다. 중국 망명후 상해에서 도산 안창호를 만났다. 도산은 김창빈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라고 권고했다.

로스앤젤리스에 도착 후 흥사단에 바로 가입을 했다. 단우번호는 270번. 김춘하는 도산의 가르침에 따라서 평생을 살았다. 1938년에는 흥사단 미주위원부 심사부장이 되었다. 그가 평양을 빠져나와 망명길에 오른 후 일본 경찰은 밤이나 낮이나 그의 집에 들어닥쳤다. 그리고 아버지를 잡아다가 고문까지 했다. 망명후 35년이나 떠나있던 부인 위명호 여사를 미국으로 초청해서 노후에 행복한 가정을 꾸몄다. 평생동안 교회생활에 열심이었다. 신앙이 그에게 큰 힘이 된 것은 도산 안창호에게서 배웠다.도산은 그에게 「사람이 세상에 나서 제일 좋은 것은 친구」라고 말했고 이를 실천하며 살았다. 흥사단 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다.

1982년 6월 생전에 인터뷰할 때에 “별로 큰 일을한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나라를 찾기 위해서 당연히 했을 일이다.”라고 자신이 젊어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것을 겸손하게 말했다. 1983년 8월26일 92세로 세상을 떠났고, 헐리웃퍼레스트 론에 잠들어 있다.

성명 : 김창빈 (춘하)
훈격(연도) : 애족장(1996)
운동계열 : 국내항일
출생지 : 평안남도 대동
생존기간 : 1891. 8. 6 ~ 1983. 8.26

평안남도 대동 사람이다. 1919년 2월 곽권응 등 4명은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하고 많은 대중을 참가시키기 위해 평양의 6개의 장로파 교회와 연합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이 운집하는 고종의 봉도식을 거행하는 관후리에 있는 숭덕학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는 서울에서 인쇄된 것을 사용했다. 거사 일인 3월 1일, 숭덕학교에서 거행된 고종의 봉도식이 끝난 후, 김선두의 사회로 정일선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강규찬이 독립정신에 관하여 연설을 했다. 독립선포식이 끝나자 김창빈 등은 운집한 1,000여 명의 군중들에게 수백개의 태극기를 배포하였으며, 이들과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 직후,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홍석운, 김송혁 등과 평양에서 의용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또한 그는 임시정부 평양교통국장으로 활약했다. 1919년 10월, 김석황이 독립신문 제작에 필요한 비용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잠입하였을 때, 그와 함께 자금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의용단의 조직이 발각되는 상황에서 1920년 10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후 안창호 소개로 1922년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흥사단원으로 활약했다.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창빈(춘하)과 부인 위명호. 흥사단 단우였다.

김창빈(춘하)과 부인 위명호. 흥사단 단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