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림

비행학교 설립에 재정지원을 담당한 백미대왕 김종림

김종림김종림은 재미동포 백만장자 1호이다. 그를 백미대왕(Rice King)으로 불렀다. 초기 한인중 가장 많은 농토를 가지고 북가주에서 쌀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큰 돈을 벌었다. 번돈을 독립운동을 위해, 한인사회를 위해서 거액을 기부했다.

김종림은 특별히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 한인 2세나 유학생을 위해 장학금을 많이 냈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공적으로는 미국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세우고, 한인 공군을 길러 내는데 최대의 재정 후원자가 된 것이다. 1916년 호놀룰루의 대조선 국민군단병학교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와있던 노백린이 “우리 비행사들의 긍극적인 목표는 일본 도쿄이다. 독립전쟁이 일어날 때 일본에 날아가 천황궁 등 폭격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젊은 비행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종림은 1920년초 노백린 장군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결정을 내린 것이다. 공군 양성계획에 흔쾌히 동참했고 약 2만달러의 지원금을 낸다. 또한 매달 3천달러씩 지원해서 교사의 월급지원 및 운영비를 냈다. 1920년 6월22일에는 실제로 비행기를 구입하고 학생들에게 실습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해 폭우로 인해서 쌀농사가 실패하자 재정지원에 문제가 생겼고 비행학교는 결국 문을 닫는다. 짧은 기간이지만 미주한인사회에 대한독립을 위한 가장 획기적인 발상과 실천을 한 것이다.

김종림은 1913년 5월13일 도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단할 때에는 함경도 대표로 참가했다. 흥사단 단우번호는 34번. 미주 독립운동 지도자 중 한국인과 중국인으로 대일투쟁을 하는 조선의용대가 1940년 5월 발족할 때 미주후원회 제1차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종림의 두아들 김진원과 김두원은 2차대전 때 미해군으로 대일전에 참전, 3부자 모두 일본과 싸웠다. 1973년 로스앤젤리스에서 별세했고, 2009년 4월 13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성명 : 김종림
훈격(연도) : 애족장(200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함경남도 정평
생존기간 : 1886. 1.19 ~ 1973. 1.26

미주지역에서 조직된 공립협회, 대한인국민회 등에서 활약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0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에 가입하여『공립신보』발간에 참여했다. 1909년 공립협회가 국민회로 발전할 때 법무원의 임시대판 등으로 활동했다. 1910년 이후 대한인국민회 솔트레이크시티 지방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대한인국민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3년에는 흥사단 함경도 위원에 선임되었고, 1919 · 1920년 대한인국민회 지방위원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직접 출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금모집에도 힘을 쏟았다.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여러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했다. 그는 1920년 노백린 장군과 함께 캘리포니아 윌로스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여, 자금을 제공하고 고문으로 비행사 양성에 기여했다.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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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창단 때 함경도 대표인 김종림. 단우번호는 3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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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비행학교에서 비행 훈련중인 홍종만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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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스 데일리 저널이 한인비행학교에서 두번째 훈련용 비행기를 샀다고 보도했다. (1920년 6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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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주의 벼농사를 짓는 농장. 미국의 논은 물이 고여 있는 한국과 달리 밭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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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림의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식에 참석한 가족. 왼쪽 며느리 로즈 김, 손자 스티븐 김, 김재수 LA총영사, 손녀 스테파니 김 (2010년 7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