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을 연합사업으로 이끌어 간 중심인물 김원용
초기이민사회에서 모범을 보인 인사가 김원용이다. 애국애족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고결한 애국지사라고 평가를 한다. 그는 유학을 목적으로 1917년 5월 미국에 왔다. 오하이오대학에 재학중인 1920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인학생총회 결성회의에 발기인 대표로 참가했다. 김원용은 교포사회가 연합해서 조국에 이바지하는 민족적 사업, 교포들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 그리고 언론계에서 세운 공이 참으로 크다. 하와이 국민보 주필로 교포의 계몽화, 의식화에 앞장을 섰다. 1923년 4월부터 7년간 중부, 동부에서 독립운동 지방조직을했다. 한편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를 했다.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김성락 원로목사는 “김원용은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교포사회를 조직 단합하고, 그들의 힘으로 독립운동을 하게 했다.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탄생은 불가능했으나 이를 가능하게 했고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고 높게 평가를 했다. 소니아 신 선우 여사와 생전 인터뷰에서 그는 “한인은 너와 나를 막론하고 가난했다. 그러나 왜놈의 조국 침략에 반대하고 광복운동에 있는 재산을 다 털다싶이 했다.”고 말했다.
김원용은 이승만 박사와는 독립을 위해 걷는 길이 달랐다. 그 이유는 이승만 박사가 국민회의 하는 일은 모두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승만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도 처음에는 찬성을 하고 참여를 했으나, 나중에는 나가서 독자적으로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미주 동포사회의 분열은 이승만 박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강조했다.
김원용은 8년간에 걸쳐 재미한족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를 모았고 1958년 12월, 「재미한인50년사」를 펴내는 등 초기 이민역사 및 인물역사 정리에 귀한 저서를 남겼다. 김호의 재정적 도움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고 미주한인역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역사서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너무 대한인국민회 입장만 대변했다고 말하는 인사도 있다. 「 재미한인50년사 」는 그의 최대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중가주 리들리에서 김호가 1957년에 세운 한인재단 재무 및 총무로 봉사했다. 김원용은 1976년 2월9일 로스앤젤리스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부인은 캐더린 김 그리고 딸 엘로이스를 두고 있다.
성명 : 김원용 (金元龍, Warren Kim)
훈격(연도) : 애국장(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서울
생존기간 : 1896. 12.25 ~ 1976. 2. 9
서울 사람이다. 1917년 5월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망명을 왔다. 오하이오지역 한 대학에 재학하고 있던 중, 1920년 4월 결성된 학생총회결성발기자회에 오하이오주 학생대표로 참석했다. 미주 각 지방에 있는 한인 학생과 학생회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1923년 4월부터 7년간 미국 중서부와 동부지방에서 독립운동 후원을 위한 지방조직 결성에 참여했다. 그 후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던 그는 1930년 7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와 대한인교민단으로 분열된 하와이 한인 단체의 부흥과 민족운동 강화를 촉진할 목적으로 개최한 미포대표대회에 참석했다. 미주와 하와이 단체 대표들이 모인이 회의에서 미주대표로 선출된 그는 동지회의 조직 개량, 각 단체를 망라하는 연합기관의 구성, 미주와 원동각지를 연락하여 민족운동을 강화할 것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계획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이승만의 동지회 확장계획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1931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의 기관지 「국민보」의 편집인으로 임명되었고, 이승만이 동지회 재정을 충당할 목적으로 교회재산과 교민단 회관을 매각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이승만 중심의 체제를 몰아내고 민족운동에 전념할 하와이 한인단체를 건설하고자 투쟁했다. 1932년 1월 교민단을 변경하고 하와이 한인단체를 통합시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재건시키는 한편, 이듬해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무로 임명되어 하와이 한인사회의 부흥과 민족운동을 강화하는데 노력했다. 또한 1932년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특무공작을 후원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결성된 하와이애국단에가입하여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의 거사를 후원했다. 1936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국민보」 주필로 임명되어 한인 교포들의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 운동단체인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간의 전쟁이 고조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했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16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준비회를 개최하자, 그는 이 준비회의 비서로 임명되어 대회 규정을 작성했다. 이어 20일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자, 안원규 등과 함께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대회의 선언문과 해외한 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여 독립전선 통일문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확대문제, 대미외교기관 설치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 등을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같은 해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가 설치되자, 의사부의 비서 겸 행정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힘있게 추진했다.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자 의사부 위원으로서 동지회를 제외한 단체들을 결속하고 연합위원회 임원을 개선하는 등 진용을 정비하는 한편, 1944년 6월 이승만 계열의 외교위원부가 독자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직속의 외교사무소를 워싱턴에 개설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외교사무를 전개했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이 해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할 것을 명령하자, 그 해 10월 로스앤젤리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 단체가 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 대표원으로 참석한 그는 개조된 구미외교위원부 외교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3월 대한민국임시 정부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평화를 준비하기 위해 개최될 연합국회의에 파견대표로 선임되었으나 미 국무부로부터 한국 대표의 참가를 허락받지 못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같은 해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으로 선출된 그는 조국이 광복되자, 그 해 10월 조국의 재건을 후원할 목적으로 구성된 재미한족국내 파견대표단 부단장으로 선임되어 고국을 떠나온 지 28년여만에 조국의 땅을 밟게 되었다. 귀국 후 1946년 12월 미군정이 한국에 민주국가 건설의 법률을 기초하여 장차 수립될 남북통일정부의 행정이양을 준비하기위해 설립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선출되어 법제, 사법분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1년간 활동하면서 조국의 건설에 이바지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8년간에 걸쳐 재미한인들의 민족운동에 관한 자료를 모아 1958년 12월 「재미한인50년사」를 탈고하는 등 일평생 미주 한인사회에서 민족운동을 위해 헌신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