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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중

대미 언론과 외교로 독립운동에 나선 김용중

김용중충청남도 금산 사람으로 1917년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왔다. 고등학교 과정부터 미국에서 공부했다. 하바드대학과 예일대학에서 수학하고 컬럼비아대학을 수학했다. 김용중은 영어와 외교능력이 뛰어나며 김호와 김형순의 김브라더스에 참여하여 회사를 더욱 발전시켰다. 성공한 초기의 사업가이다. 그래서 한인사회에서 김형순, 김호, 김용중 세사람을 중가주 3김이라고 불렀다. 후에 고향선배인 송철과 함께 김브라더스의 과일을 위탁판매하는 케이에스회사(K & S Co.)를 설립했다. 김용중과 송철은 비록 다른 정치단체에 속해 있었지만 사업에는 한마음으로 성공을 시켰다.

김용중은 국민회 회원으로 워싱턴DC에서 13년간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라는 영문 월보를 출판해서 미국사람에게 알렸다. 독립운동의 자원지원과 외교 활동을 위해 열심이었다. 월간지를 내면서 각국 외교 담당자를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42년 9월에는 헐리웃 라디오방송국에서 연설을 통해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요청했다. 1942년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선전과장으로 워싱턴에 특파되어 제2차대전의 미국의 승리와 한인동포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노력했다. 김용중은 1943년에는 한국문제연구소를 창립, 기관지 한국의 소리를 영문으로 발간하여 미국과 각국의 정책담당자들과 한국독립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광복이후에는 조선사정소개협회를 만들어 한국의 중립화 통일 방안을 제시했다. 한반도 중립론의 선구자이다.

김용중은 김형순의 맏딸 메리 김과 결혼했다. 김형순과 한덕세의 맏딸 메리는 한때 이승만 박사와 결혼이야기가 오갔다. 이승만 박사는 한덕세의 딸과 결혼을 생각했지만 김형순이 너무 나이차이가 많이 난다고 반대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행방 후에는 이상주의적 노선에 따라 남북의 자주적 평화적 통일을 추구한 통일운동가이다. 1975년 9월 UCLA병원에서 7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부인 메리 김여사는 “남편은 남북통일의 간절한 염원으로 유골을 비무장지대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말했다. 2000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고, 2001년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성명 : 김용중
훈격(연도) : 애족장(2000)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충청남도 금산
생존기간 : 1898. 3.2 ~ 1975. 9.6

충청남도 금산 사람이다. 일찍이 미국으로 이민한 그는 학문 연마를 통해 실력을 양성한 후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라는 도산 안창호의 권유를 받고 하바드대학, 남가주대학, 콜롬비아대학 등에서 수학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역량을 쌓았다. 1940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제5차 대표대회에 몬타나지방 대표로 참가하여 중앙상무위원회 선전위원에 선임되었다.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서 민족통일운동과 독립운동 강화라는 중대 임무를 띠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어 하와이 호놀룰루에 의사부, 로스앤젤리스에 집행부를 두었다. 김용중은 집행부 선전과장에 선임되어 대서방 외교활동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았다. 그는 워싱턴에 주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와 협조하며 태평양전쟁 때 재미동포들의 신분보장과 미국 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42년 2월에 개최된 한인자유대회를 준비하고 단합하여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등 활동했다. 이어 3월에는 뉴욕에서 개최된 26개국 동맹원탁회의에 참가하여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같은 해 9월 17일에는 헐리웃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2주기를 맞아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라디오 방송을 하기도 했다. 1943년 한국문제연구소를 창립하고 기관지로 『한국의 소리』를 간행하며 미국 정관계 및 국제기구의 요인들에게 한국의 실상과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미국 전쟁공보국에서는 그에게 대한국인 방송을 요청하기도 했다.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자 미국의 대표적 신문인 「워싱턴포스트」지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기고했다. 한편 그는 1919년 이래 광복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헌납했다. 광복 후에는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 옵서버로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하는 등 한국의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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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군 사열식 후 김용중과 대원들. (동그라미 안 . 1942년) 김호, 김용성, 송헌주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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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중이 대한독립과 미국 승전을 기원하기 위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만든 뱃지를 달고 있다.(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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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의 김용중 (1974년 로스앤젤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