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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성

의사로 2차대전 때 맹호군 사령관 맡은 김용성

김용성김용성은 의사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1928년 하바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이해 11월28일 캘리포니아주 의사시험에 합격을 했다. 그리고 로스앤젤리스에서 병원을 열었다.

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LA한인 국방경위대인 맹호군을 편성할 때 사령관으로 활동을 했다. 맹호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회의 인준을 거쳤다. 1942년 4월 26일에는 김용성 사령관 지휘로 LA다운타운에서 퍼레이드를 벌였다. 1943년 12월 신한민보에 “한국은 다시 자유를 찾고 독립될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

성명 : 김용성 (Arthur Y. S. Kim)
훈격(연도) : 독립장 (1998)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생존기간 : 1897 ~ 1962. 6. 13

평양 사람이다. 1912년 9월 네브라스카주 한인소년병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고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위원과 1944년 주미외교위원부 외교위원장 등으로 활약하며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 박용만과 정한경 등이 네브라스카에서 독립군간부를 육성하여 만주·연해주지방에 파견,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설립한 학교이다. 이곳에서 주로 방학을 이용하여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야간에 군사교련과 국어, 영어, 한문, 일본어, 수학, 역사, 지지, 이과, 성서, 병과 등을 3년간 배웠다. 그후 그는 1941년 4월 설립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하며, 한인 국방군 편성계획에 참가했다.

당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군과 힘을 합하여 대일승전을 기약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연합국의 인정을받기 위하여 남가주 로스앤젤리스에 한인국방경위대를 편성한 것이다. 그런데 1942년 2월 한인국방경위대가 맹호군으로 개칭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인준을 거쳐 임시정부 관할하에 있게 되자 그는 맹호군의 사령관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THE NEW KOREA』1943년 12월호에 기고를 통해 카이로선언에 따라 “한국이 독립하게 될 것이나, 그 절차나 방법은 반드시 완전한 자유와 절대적인 독립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1944년 10월 미주와 하와이 각지 대표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위원부 개조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대표회의에 참가하여 주미외교위원부 외교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미국 당국에 홍보하는 등 대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용성(왼쪽 두번째)과 부인 아들리. 딸 자넷 김(중앙)의 16세 생일 파티를 빌트모어호텔에서 했 다. 옆은 미상, 베티 구와 앨리스 이 (1945년 12월)

김용성(왼쪽 두번째)과 부인 아들리. 딸 자넷 김(중앙)의 16세 생일 파티를 빌트모어호텔에서 했다. 옆은 미상, 베티 구와 앨리스 이 (1945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