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애국지사로 흥사단에 열심인 김성권
김성권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도착한 것은 1904년 26세 때이다. 고향 진주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새 학문을 배워보겠다고 이민선을 탔다. 하지만 하와이에서의 노동은 천성적으로 맞지가 않았다. 이를 보다못한 친구 강영소가 그에게 노동자를 위해서 음료수를 팔 수 있는 조그만 점포를 내주었다. 그것도 제대로 되지가 않았고 1908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미국 상점에서 종업원으로 몇년 일한 뒤에는 수중에 어느 정도 돈이 모아졌다. 김성권은 떠나온 고향 진주를 찾았고, 두 동생 김필권과 김수권을 이때 초청했다. 초기이민자로는 드문 일을 한 것이다. 김성권은 1913년 12월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대위 목사 주례로 강혜원과 결혼을 했다. 신랑은 39세, 신부는 28세이다. 결혼 후 다뉴바농장으로 이주를 해서 과일을 따는 일에 종사했다. 김성권은 평생을 대한인국민회 보다는 흥사단에 열심이었다. 이에 부인 강혜원은 “남편은 하와이에서 장사를 하다가 잘 안된 책임때문에 국민회 보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흠모해 평생을 흥사단을 위해서 살았다.”고 생전 인터뷰 때 저자에게 말을 한적이 있다. 흥사단 단우번호는 91번. 김성권은 하와이 에와농장에서부터 강씨 5형제중 둘째인 강영소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고 항일운동으로는 부인과 함께 벌인 일화배척
운동을 손꼽을 수 있다. 김성권은 전형적인 한학자이자 착실한 기독교인이다. 로스앤젤리스에서 장고할아버지로 이름난 김필권 그리고 멕시코로 신부를 구하기위해 갔다가 화장품 사업으로 성공한 김수권을 고향을 방문 초청한 일이 아주 특별하다. 세계적인 작곡가인 김을 하바드 음대교수가 막내, 2차대전에 참전한 치과의사 김인이 둘째, 그리고 맏아들 김낙은 치과기공사로 모두 세아들을 두었다. 세아들 교육을 참으로 잘 시켰다. 김성권은 1960년 1월20일 향년 85세로 별세했다. 부부 독립유공자인 김성권과 강(김)혜원은 로즈데일묘지에 나란히 묻혀 있다.
성명 : 김성권 (金聲權, Sung Kwon Kim)
훈격(연도) : 애족장 (2002)
운동계열 : 항일운동
출생지 : 경상남도 진주
생존기간 : 1875. 2.15 ~ 1960. 1.20
경남 진주 사람이다. 상인이었던 부친 김용한과 모친 구달씨 사이에 5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1902∼1903년 도일하여 신문물을 익혔다. 1904년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로 이민을 온 뒤 에와농장에 배치되어 노동을 했다. 1905년 5월 정원명, 강영소, 윤병구, 김규섭, 이만춘등과 항일운동, 일화배척,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에와친목회를 결성했다. 1906년 5월부터 1년간 기관지 친목회보 주필로 필봉을 휘두르며 한인들의 결속과 애국정신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강영소 등의 도움으로 상점을 경영하면서 1905년 8월 호놀룰루에서 한인상조회를조직하기도 했다. 1907년 3월부터 하와이 한인단체 통합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여 9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24개 한인단체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하와이 한인의 통일기관인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하는 산파역을맡았다. 한인합성협회 조직후 동회 총무와 기관지 한인 합성신보 주필로 선임되어 한인사회 통합운동과 민족의식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08년 2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그는 안창호 등이 이끄는 공립협회 찬성원으로 가입하는 한편,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대표자격으로 1908년 7월 덴버에서 박용만 등이 개최한 애국동지 대표회에 참석했다. 공립협회와 한인단체 통합을 지속적으로 논의한 끝에 1908년 10월 양회 합동을 발표하여 1909년 2월 미주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국민회를 탄생시켰다. 1913년 12월 이대위 목사의 주례로 강혜원과 결혼한 뒤 중가주 롬폭, 다뉴바 등지에서 포도농장과 점포 서기 등으로 일했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대한인국민회 수전위원으로 캘리포니아주 맨티카와 다뉴바지역을 순회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스스로 독립운동자금을 의연하기도 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흥사단 의사부장과 이사장을 역임하며 흥사단을 위해 평생 젊음을 불사른 흥사단원이었다. 부인 강혜원은 다뉴바에서 안창호의 도움으로 조직된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부단장으로 선임되어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41년 2월 중국 한구에 있는 조선의용대를 후원할 목적으로 로스앤젤리스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1942년 5월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편입 이후, 1943년 1월 회명을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로 개칭하고 김원봉의 민족운동을 후원했다. 1943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9월에는 변준호, 최능익, 김강 등과 더불어 기관지 ‘독립’을 발간하고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선임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민족운동에 진력했다. 1960년 1월 로스앤젤리스에서 별세하여 로즈데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