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40여 차례에 걸쳐 독립기금을 낸 김동우
김동우는 189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다. 3.1운동에 참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도산 안창호를 평생 존경했고,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을 통해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흥사단 단우 번호는 312번.
1923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양주은 옹과 함께 동포사회를 위해서 많은 봉사를 했다. 새로 이민오는 초기 한인들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다. 평생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지 않고 살았다. 무엇보다도 김동우는 독립금을 계속해서 냈다. 1925년 4월16일에 인구세 1달러를 낸 것을 시작으로 1943년 11월 독립금 20달러를 전달하는 등 모두 43차례에 걸쳐서 모두 1천6백달러를 냈다. 그리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위원으로 있을 때에는 미국 국방공채를 1천달러어치나 구입했다.
1944년 12월23일 대한인국민회 제9차 대표회의에는 샌프란시스코 지역대표로 참석했고 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 김호) 서기를 맡는 등 광복 후 준비에 참여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독립운동 및 한인사회의 산 증인이자 큰 지도자가 바로 김동우였다.
1966년 한인회를 창립할 때는 초대 회장을 맡아서 새 이민사회로 가는 원로인사로서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한 삶을 산 김동우는 1988년 8월28일 향년 90세로 별세했다. 미주 독립유공자로 1997년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성명 : 김동우
훈격(연도) : 애족장 (1997)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경상남도 진주
생존기간 : 1896. 1. 8 ~ 1988. 8.28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가 전개될 때 적극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2년여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3년 금릉대학을 졸업했다. 그후 김동우는 미국으로 건너와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집에 앞장서는 한편 자신도 꾸준히 인구세 · 의무금 · 국민부담금 · 광복군후원금 · 국방공채 · 독립금 등을 출연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1937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상항지방회서기 및 지방대표에 선임되어 국치기념일, 순국선열기념식 등을 주도하였으며, 1941년 이후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집행위원, 서기 등으로 활동했다.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뜻있는 미주의 한인들은 이때를 조국 독립의 기회로 생각하고 무력 양성을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1941년 1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한인국방군 편성계획을 미육군사령부에 제출하고, 로스앤젤리스에 한인국방경위대로서 맹호군을 창설했다. 이들은 이러한 계획을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알려 1942년 2월 정식 인준을 받아냈다. 그는 맹호군의 상항지대원으로 활동했다.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