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국민회 지도자로 독립운동 참여한 김기창
김기창은 개성에서 태어났다. 멕시코로 떠나기전 한약재 장사를 하러 전국을 다녔다. 1905년 멕시코 어저귀 농장 이민길에 올랐고, 4년 노동계약이 끝난 뒤에는 멕시코 초기이민사회 지도자로 나섰다. 1909년 5월26일 305명의 창립위원과 함께 메리다 대한인국민회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북미와 손을 잡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대한인국민회 중심인물은 김기창이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는 1912년 4월10일 멕시코 메리다 국민회 김기창을 의무금 수봉위원으로 위탁하는 공문을 보냈다. 멕시코 해동학교를 설립했고 교장을 맡아 초기이민 2세에게 민족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1918년 도산 안창호가 멕시코를 방문할 때 만난 후 흥사단에 가입했다. 단우번호는 136번. 1920년 8월7일 구미위원부 김규식 위원장은 김기창을 멕시코 유카탄 메리다지역 구역시찰원으로 임명했다. 상해 임시정부를 위한 모금운동에 참여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1921년 6월11일 멕시코에서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다. 국민회는 김기창 환영회를 열었다. 그후 새크라멘토와 윌로스, 다뉴바 그리고 로스앤젤리스를 순방하고 8월2일 유카탄으로 돌아갔다. 김기창의 딸 메리가 1925년 뉴욕에서 임용희 아들 임초와 결혼했다. 임초는 한국의 105사건에 억류되어 고초를 겪었고, 1913년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성명 : 김기창
훈격(연도) : 애국장(2011)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경기도 개성
생존기간 : 미상 ~ 1878. 8. 31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멕시코 메리다지방에서 활동했다. 1911년에는 서기를 맡았다. 대한인국민회는 분리되어 있던 미주지역 한인사회 단체를 1910년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 결성된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단체였다. 조직의 목표는 미주 사회의 안녕과 자치 신장, 그리고 조국의 독립이었다. 대한인국민회에서 서기, 재무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아 한인사회의 발전과 항일운동을 위해 노력했다. 1915년에는 멕시코 정부에 청원하여 한인 자녀들을 위한 한인국어학교를 설립했고 교장을 맡았다. 1917년 해동학교가 설립되었는데, 교장의 직책을 맡아 학교운영을 총괄했다. 김기창은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서 멕시코 메리다지방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수백달러의 독립자금, 즉 의무금, 보조금, 인구세,군사운동금 등을 의연했다.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