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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인

사업 성공후 독립운동 재정을 지원한 권도인

권도인권도인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을 온후 사업과 독립운동을 위해 한 삶을 살았다. 사진신부로 1912년에 하와이에 도착한 부인 이희경도 여성으로 독립운동가의 길을 함께 걸어갔다. 권도인과 이희경은 나란히 국권회복운동에 나섰고, 훗날 부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권도인은 1905년 신기술을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한국을 떠났다. 하와이에서 대한인국민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처음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으나 훗날 사업가로 우뚝 섰다. 하와이에서 가구점을 경영했고 샌프란시스코에 지점을 낼 정도로 장사를 잘했다. 사업가로 성공한 뒤 독립운동을 위해서 적지않은 재정지원을 했다. 그리고 독립기금 모금에도 앞장을 섰다.

사진신부 이희경은 여성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특별한 길을 걸었다. 하와이에서 하는 독립운동이 성에 차지않았다. 그래서 일제치하에 한국으로 직접 뛰어 나갔다. 아이 엄마의 몸으로 한국으로 나간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개화한 여성으로 미국에서 온 이희경은 3.1운동을 조직하고 직접 참여, 옥살이까지한 독립유공자이다. 권도인의 2남2녀중 2남 권영만은 2차대전 때인 1940년 미군 ROTC 장교로 참전했다.그리고 공인회계사(CPA)가 된 후 초기이민2세 케리 윤과 결혼했다. 맏딸 마가렛 배는 The Dreams of Two Yimin이라는 저서를 펴냈다. 그리고 여동생 에스더 권은 작가, 여성운동가 그리고 인권변호사로 하와이에서 유명해졌다.

성명 : 권도인(權道仁, Doin Kwon)
훈격(연도) : 애족장 (1998)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
생존기간 : 1888. 9.27 ~ 1962. 4.24

안동 사람이다.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권도인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골노아지방회 회장으로 활약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사회는 임시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통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1925년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과 더불어 구미위원부가 폐지됨에 따라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은 침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면서 인구세와 혈성금 등을 통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그는 1937년 대한인국민회 재무를 담당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앞장섰으며, 1938년에는 하와이 연합의회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러한 가운데 중국에서 1938년 조선의용대가 결성되자, 미주에서도 이를 후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고 1939년 4월 의용대후원회가 뉴욕에서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로스앤젤리스, 시카고 등 미주 본토와 하와이, 쿠바, 멕시코 등에 지부가 설치되었다. 이들은 배일선전과 군사후원금 모집을 위한 각종 대중집회와 기념대회를 개최하면서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1940년 5월에는 대내외 공작의 통일을 위해 의용대후원회 연합회를 발족시켰는데, 이때 권도인은 연합회 대표로 선임되었다. 그는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롤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연합회 대표로 참가했다. 미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에 힘을 쏟으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18년 대조선독립단 임원시절의 권도인(뒷줄 오른쪽 첫번째)

1918년 대조선독립단 임원시절의 권도인(뒷줄 오른쪽 첫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