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 흘러도 그날의 감격은 여전히 생생”
▶ 독립운동 중 보내주신 어머니 자필 편지들 지금도 고스란히 간직
최초의 여성 광복군 고 신정숙 여사의 아들 장영원 선생이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박상혁 기자]
“광복절이 돌아올 때마다 그 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한국이 해방을 맞은지 71돌이 됐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애국지사들의 뜻과 정신을 기리는 광복절을 맞이해 최초의 여성 광복군이었던 고 신정숙 여사의 아들 장영원(87) 선생은“1945년 8월15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비록 광복이 되고 1년 후에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지만 그 날의 감격은 잊을 수 없다”고 당시의 북받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장영원 선생의 어머니 신정숙 여사는 지난 2014년 국립대전현충원이 뽑은 8월의 현충인물로 선정됐다. 1910년 5월12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8남매 중 2녀로 태어났고 집안대대로 일제에 항거하다가 식구들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이후 ‘1호 여성광복군’으로서 1942년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에 편입됐다. 전선과 후방 모두에서 중국 유격대와 합동으로 정보수집 및 선전공작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997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정부는 1963년 신 지사의 공로를 인정,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아버지 장현근 선생(1969년 작고)도 상해·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펼쳐 그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뜻을 함께 했던 고 신정숙·장현근 애국지사 부부는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안장돼 있다.
어머니 신정숙 여사는 아버지를 찾아 어린 아들을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상해 임시정부로 떠났다. 이후 그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신정숙 여사와 장현근 선생은 중국에서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갔다. 어머니는 김구 선생 밑에서 최초의 여성 광복군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장영원 선생은 어머니 신정숙 여사를 광복 후 1946년이 돼서야 만날 수 있었다.
“광복 후 어머니가 계신다는 여관에 찾아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라는 물음이 돌아왔는데 이미 그때부터 어머니임을 알아차렸다. ‘저 영원이에요’라고 말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둘이서 부둥켜안고 그동안 얼마나 서러웠는지 2시간여 동안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리고 장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 신정숙 여사가 독립운동 전선에서 직접 자필로 써서 보내 온 편지들을 보여줬다. 그동안 얼마나 소중히 간직해 왔는지 별다른 손상 없이 잘 보존된 상태였다.
그는 “어머니가 1년에 한 번씩 외할머니 댁에 자필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를 한자 한자 읽어보면 가족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가족에 대한 애정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비극으로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희생을 지켜본 입장에서 숭고함이 느껴지고 존경스럽다. 나라 독립을 위해 한 어머니, 한 아내로서의 인생을 고스란히 바친 분이다”고 밝혔다.
장 선생은 “일제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고 나니 자기 나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미국에 건너와 살면서도 한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1994년 미주에서 광복회를 조직했다”며, “광복 71주년을 맞아 한인 모두가 애국심을 가슴 깊이 새기고 선대의 희생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애국지사 부부의 아들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부모님의 애국정신을 앞으로도 끊임없이 전파할 것이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