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망명의 길, 독립운동후 영주귀국한 곽림대
곽림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한국에서 105인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애국심으로 가득찬 젊은이는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등 30여년을 국권 회복의 길을 걸었다. 60년의 세월후 다시 고국 땅을 그리워하며 영주 귀국을 했다. 그리고 망명객으로 한평생을 미국에 살면서 독립운동에 나선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남겼다. 본인의 구술을 토대로 정리한 「못잊어 화려 강산」이 1973년 세상을 떠난 3년후, 출간되어서 미주독립운동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884년 9월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감수성이 강하던 소년시절 도산 안창호의 감화를 받고는 큰 꿈을 갖고 새롭게 살기로 결심을 했다. 곽림대의 처가는 바로 안중근 의사 집안이다. 안 진사로 불리우던 부친 안태훈이 처남이 된다. 어려서부터 5살 위인 처조카 안중근이 집에와서 자주 만나 본적이 있다.
1911년 수양동우회 105사건에 연류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후에는 신천 신성학교 교사에서 면직되고 망명길에 오르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곽림대는 1913년 4월 Mongolia선편으로 상해를 떠나 하와이에 도착을 했고, 이때 부터 평생을 도산 안창호를 존경하면서 살았다. 1927년에는 흥사단 이사부장을 맡았다. 흥사단 단우번호는 37번. 그는 1919년 2월 시카고에서 만난 노백린에게 백미대왕 김종림의 협력을 받아서 비행학교를 설립하도록 권유를 했다. 그 자신도 비행학교 교관이 되어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곽림대는 노후를 한국에서 보내기 위해서 86세 때인 1970년 6월17일 영주귀국 길에 올랐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1년 11월24일 망명객으로 한많은 삶을 고국에서 마쳤다.
성명 : 곽림대
훈격(연도) : 애국장 (1993)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황해도 신천
생존기간 : 1885. 9. 9 ~ 1971.11.24
황해도 신천 사람이다.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한 뒤, 1909년 신천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11년 11월, 일제가 민족지사들을 대거 탄압함으로써 국망 초기 한국 독립운동의 근원을 차단하기 위해 사내정의 총독 암살 기도로 조작해 냈다. 곽림대는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모살미수로 징역 7년을 받았으나 1913년 10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인 1914년 4월 미국으로 와서 10월 21일 안창호가 주도하던 흥사단에 가입 활동했다.
1920년 2월에는 캘리포니아주 윌로스지방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김종림이 한인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할 때 참여했다.
비행사양성소에서는 1920년 5월에 비행기 2대를 사들여 미국인 기술자 1명, 한인 비행사 6인으로 교수진을 구성하였으며, 재학생은 19명이었다. 또한 학교 유지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은 교포들의 특연과 봉사로 유지했다. 그는 노백린 교장 아래서 학생들을 통솔 감독하는 연습생감독의 직을 맡았다.
그러나 한민족의 장래에 독립과 번영을 가져다 줄 한인 최초의 비행학교는 설립 후 1년 만에 재정 악화로 폐교되고 말았다. 1920년 12월에는 조국독립에 대한 의지를 실현하고자 켄터키 사립 사관학교에 입학, 군사이론을 수학했다. 1927년 1월에는 흥사단 미주위원부 이사부장에 선임되어 등사판의 「흥사단보」 간행을 주관했다. 그 뒤 1944년 10월 28일, 미주와 하와이 각지에 있던 13개의 한인단체 대표가 회동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개조안 발표에 대한 대책회의를 개최했다.
임시정부의 개조안을 통과시켰을 때 이 회합에 참석하여 김원용 등과 함께 대표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