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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배)백순

미국사회에 독립의 필요성 주창한 공(배)백순

공백순공백순은 하와이에서 태어난 초기이민 2세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미국에서 공부했다.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서 초기 1세 독립운동가를 돕는 일에 나섰다. 2차대전 때 워싱턴DC에 이승만 박사가 위원장으로 있는 구미위원부에 부름받아 나갔고 한인자유대회와 태평양대회에서 미국 주류사회를 위해 대한독립을 알리는 일에 앞장을 섰다. 이승만 박사의 외교와 선전활동을 위한 독립운동을 했다.

하와이 맥킨리고등학교와 하와이대학, LA시립대학을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특별히 웅변과 문학에 소질이 많았다. 중학교때에는 웅변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 한국 시조를 영어로 번역해서 미국인들에게 알릴 정도로 한국적인 소양과 기질이 풍부했다.

하와이 노동이민 공치순과 안숙진 사이에 맏딸로 태어났다. 황해도 출신 아버지는 하와이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면서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공백순이 한국을 알게 된 특별한 경우가 있었다. 어머니는 항상 자녀교육에서 “미국에서 기르면 아무 것도 안돼, 사람이 안된다”고 말했다. 공백순은 16세 때인 1935년 남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나갔다. 서울의 곳곳과 금강산까지 많은 곳을 보고 왔다. 그때 가난과 억압을 받고 있는 한국국민을 보았고 그후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조용히 살던 여성에서 한국 사랑과 독립운동이라는 큰 사명에 눈이 활짝 뜨인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박사의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이승만 박사의 친분 때문이었고 독립운동에서 주류사회를 향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탁월한 영어실력과 문장력, 웅변을 통한 재능 등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드물게 여성으로서 맘껏 빛을 본 것이다. 1941년 워싱턴 DC에서 배의환과 결혼했다.

해방후에는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을 했다. 배의환은 이승만 정부때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고,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주일대사와 주영대사를 역임했다. 공백순의 외아들인 배기용 박사(영어명 그레고리)는 하와이주 공공경제정책에 기여한 한인3 세 학자이다. 미상무성 경제분석가와 하와이대학 교수를 지냈다.

성명 : 공(배)백순(孔伯順, Inez Kong Pai)
훈격(연도) : 건국포장 (1998)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하와이
생존기간 : 1919. 2. 4 ~ 미상

미국 워싱턴, 캐나다 퀘백 등지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와 태평양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는 한편, 신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글을 게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942년 2월 미국 워싱톤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여 태평양전쟁에 한국인은 총동원되어 미국과 연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12월 전후 일본의 위상에 관한 문제 등을 포함한 아시아의 재건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캐나다 퀘백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보장을 주장했다. 그후 그는 1942∼1943년 2년 동안 「신한민보」, 「국민보」 영자판에 한국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했고, 1943년 「독립」 신문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정부는 1998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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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순은 1941년 워싱턴DC에서 배의환과 결혼식을 올렸다.(Roberta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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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공백순과 아버지 공치순 그리고 어머니 안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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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안숙진은 교육을 위해 어린 공백순과 아들 존을 데리고 1935년 한국에 나갔고 금강산을 여행했다. (Roberta Chang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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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시절 공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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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존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