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소

미주 독립운동의 큰 지도자 강영소의 꿈

강영소강영소를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거목이라고 부른다. 또한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라고 말한다.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두번이나 역임했고, 도산 안창호와 함께 평안도 대표로 1913년 흥사단 창단에 앞장을 섰다. 단우번호는 2번이다. 강영소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 길의 아버지 강명화를 따라 20세인 1905년 도미했다. 1934년 시카고에서 미주의 삶을 마칠 때까지 오로지 대한독립만이 삶의 최고 목표였다. 교회생활에 열심이었고, 시카고한인교회 창립에도 큰 몫을 담당했다. 미주에서 아버지 강명화와 형 동생 등 모두 6명이 독립유공자가 되었는데 그가 중심적인 역할과 책임을 다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에서 임시정부임을 표방한 대한인국민회를 통해서 한평생 국권회복에 젊음을 불태운 자랑스런 애국지사였다.

1886년 2월18일 평안남도 증산에서 강명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산공립소학교에서 부기법을 배웠다. 1906년 하와이 오아후섬 에와농장에 있던 한인교회에서 학습을 받고 1907년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일생을 경견한 크리스천으로 살았다. 1912년 그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서기 및 학무원, 그리고 1914년에는 지방회 총무로 선출되었다. 강영소는 1916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에 당선되자 옥중에 있는 장인환 의사 가출옥 청원서를 제출했다. 1921년말까지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흥사단과 국민회 그리고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활동했다.

강영소는 3.1운동 후 1920년 1월 대한인국민회 창립11주년 기념식에서 연설을 했다. 1922년 2월에 있었던 창립 12주년 기념식에서도 또다시 연설을 했다. 이날 대한인국민회에서 수여하는 기념상을 받았다. 그가 기념상을 받은 것은 지난 해에 북미총회장으로 독립애국금을 많이 모아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를 재정적으로 크게 도운 공적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시카고로 이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영소는 넷째 동생 영상과 1922년말 시카고로 이주해 식당을 경영하면서 처음으로 시카고지역 흥사단 운동과 한인교회 창립을 주도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업가의 길을 걸었고 시카고대학교 부근인 로렌스와 캣치에서 로렌스식당을 경영하면서 부를 모았다. 부인 강수순과 사이에 딸 단희와 오산을 낳아 길렀다. 형 강영대와 함께 1907년 미주 한인단체 통합운동에 주요 역할을 담당하는 등 형제 주춧돌로 자랑스런 기록을 남겼다.

성명 : 강영소(姜永韶, Young So Kang)
훈격(연도) : 독립장 (2011)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증산
생존기간 : 1886. 2. 18 ~ 1934. 8. 26

1905년 5월 29일 하와이에 이주하여 6년여를 살았다. 1905년 윤병구,정원명과 함께 하와이 한인사회의 친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에와친목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또한 강영소는 에와친목회의 윤병구,이태수 등과 1906년 호놀룰루에서 공진회를 결성했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는 등 국권이 기울어져 갔다. 이에 하와이의 대표적인 단체인 공진회, 자강회, 의성회, 국민동맹회 등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합성협회를 결성했다. 하와이의 합성협회는 1909년 2월 미본토의 공립협회가 합동하여 국민회가 되었다. 두 단체가 합동할 때 강영소는 고석주,김성권,민찬호 등과 하와이 대표로 선출되어 양 단체의 합동을 주도했다. 1910년 2월 국민회는 미주의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로 출범했다.

하와이 국민회의 서기를 맡아 활동하던 강영소는 1910년 10월 미본토로 이주하여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리스 등지에서 활동했다.

한편, 미본토로 이주한 후에도 강영소는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 서기, 샌프란시스코지방 대의원, 신한민보사 사무원 등을 역임하면서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로 성장해 나아갔다. 1913년 5월에는 안창호가 흥사단을 조직하였을 때 단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16년에는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독립운동의 연락과 행동통일을 위해 강영소와 황사용을 하와이에 파견했다.

강영소는 하와이 한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원조하라고 설파하여 국민회와 독립단의 통합에 합의하여 1919년 7월 18일 합동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영소와 황사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와이 국민회와 독립단의 통합은 결렬되었다. 하와이에서의 특파활동을 마친 강영소는 다시 미본토로 돌아와 1919년 1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이 되어 미주지역 한인사회를 위해서 헌신했다. 이 같은 강영소의 애국적인 활동과 동포사회를 위한 노력에 대해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22년 1월 국민회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강영소는 시카고지방으로 이주하여 15년 동안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34년 8월 별세했다.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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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샌프란시스코의 강영소(왼쪽) 와 홍언 그리고 최정익(도산 안창호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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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6월11일부터 13일까지 시카고에서 열린 북미한인학생연합회 총회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첫째줄 왼쪽 여덟번째 강영소 부인, 둘째줄 왼쪽부터 여섯번째 강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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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창립회원. 앞줄 왼쪽부터 박상하, 정원명 초대 총회장, 강영소 비서, 이내수 부회장, 성용한 총무, 성명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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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로렌스 캣지에서 카프테리아를 소유한 강영소(오른쪽)와 부인, 그리고 동생 강영상이 식당 뒤에서 잠시 휴식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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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 아들 강오산. 미국 시민권자로 1947년경 대구지역 미국 공보원장으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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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어빙 팍 묘지의 강영소 묘비. 대한인국민회를 통해서 평생 독립운동을 했다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