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아들의 책임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강영대
21세의 평양 청년 강영대가 아버지 강명화를 따라 하와이 노동이민 길에 오른 것은 1905년 5월29일. 미국에 이민을 온후 평생동안 네 동생을 지켜주는 맏형으로의 책임과 대한을 위한 독립운동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서 쉼이 없이 걸어 나갔다.
1908년 11월30일 하와이 합성협회 대표 7인에는 동생 강영소가, 그리고 공립협회 대표 6인에는 맏형인 자신이 뽑혀서 형제가 나란히 국민회 탄생의 주춧돌이 되는 아름다운 기록을 남겼다. 1909년 2월10일 국민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직후 7월14일부터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 주필도 잠시 맡았다. 그리고 흥사단에 가입했다. 강영대의 단우번호는 22번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 이사원으로 활동하면서 흥사단의 영문 명칭인 Young Korean Academy에 찬성한다는 편지를 1914년 7월27일과 8월11일 두차례에 걸쳐서 도산 안창호에게 보낸 열성 흥사단맨이었다.
강영대는 1920년이후에는 영소, 영문, 영상, 영각의 네명 동생들 가운데 영소, 영문, 영상과 함께 시카고에서 식당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셋째인 강영문이 형제 가운데 시카고에 가장 먼저와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1885년 평안남도 증산에서 태어났고, 서당과 증산공립학교를 마쳤다. 그후 1904년 서울로 이주했다. 1909년 1913년까지 남가주로 이주해와서는 미국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성명 : 강영대(姜永大, Young Dae Kang)
훈격(연도) : 애족장 (2013)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증산
생존기간 : 1885. 10. 28 ~ 1948. 7. 20
1905년 미주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공립협회 대표로 1908년 11월 하와이 합성협회 대표와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909년 2월 국민회를 창립했다. 1909~1933년까지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리스지방회 학무원, 북미지방총회 대의원, 신한민보 편집인, 수청지방총회 대표원, 중앙총회 대표원회 의장, 시카고지방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공립협회를 조직하자 가입하여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응접위원, 11월 공립회관 신축예식 축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공립협회 대표로 1908년 11월 하와이의 합성협회 대표 최정익, 이대위 등과 발기인으로 1909년 2월 1일 국민회를 조직했다.
1909년 로스앤젤리스지방회로 이전하여 3월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사 로스앤젤리스지사 사무원, 6월 학무원, 7월 신한민보사 편집인, 북미지방총회 대의원을 지냈고, 1909년 9월부터는 클레아몬트학생양성소 학생이자 양성소 학무원, 1910년 로스앤젤리스지방회 대의원, 북미지방총회 학무원으로 활동했다. 1911년 11월 수청지방총회 대표원으로 선출되어 1912년 중앙총회 제1차 대표원회에 참석했고, 1914년 9월 클레아몬트학생양성소 감독, 1915년 중앙총회 대표원회 의장, 1917년 북미총회 대표원, 1924년 민립대학기성회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시카고지방회로 이전하여 1934년 시카고지방회 부회장으로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