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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각

애국심이 투철한 5형제 막내 강영각의 삶

강영각.bmp영강영각은 1897년 평안남도 증산에서 강명화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8살때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 이민길에 올랐다. 12살 때 다시 로스엔젤리스로 이주해와서 살았다. 업랜드소학교와 클레아몬트중학교, 그리고 포모나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특별히 기악에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전 주미대사 장리욱 박사가 말하는 강영각에 대한 회상이다. “영각 군은 여러모로 보아 천재적 소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온통 미쳐버리기 일쑤였고, 어떤 기발한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리는 대범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포모나대학 3학년에 재학하면서 대학악대 리더였다. Young Kang 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전문 악기는 코오넷(트럼펫과 비슷한 악기). 음악에 탁월한 강영각은 다뉴바와 클레아몬트에서 한인악대를 조직해 지휘하기도 했다. 그가 지휘하는 밴드는 반군국주의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남가주에서 공부를 마치고 1920년 하와이로 돌아가 와히아와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1925년에는 영문격월간 한인소년(The Young Korean)를 창간했다. 이태성과 함께 뜻을 모아 한인학생 동문, 한인대학생 클럽, 그리고 태극클럽을 조직했다. 1925년 6월 기관지 단산시보를 발간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폈다. 강영각은 1907년 9월에 세워진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현 올리브 연합감리교회)를 다니면서 안창호 목사를 도왔다. 1931년 흥사단에 입단했고, 1944년 제12반 하와이 반장이 되었다. 단우번호는 261번.

강영각이 1931년 9월17일 신한민보에 쓴 독립운동에 나서겠다는 글이다. “나는 두가지 결심을 하고 장래에 실행하고자 하나이다. 첫째는 국민을 위하여 더욱 힘과 마음을 다하여 일을 계속하려고 하며, 둘째 국민회를 위하여 나의 재능과 물질적 도덕적 그리고 모두를 다하여 돕고자 하나이다. 결론으로 나는 아메리카 안에 생각이 있는 모든 인도자 여러분에게 간청할 것은 미국 땅의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우리 청년들의 다중적 협동적 운동을 협찬하여 주시시요.”

포모나대학을 졸업한 후 평생을 민족주의자로 국민회를 통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강영각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 떠나온 조국의 자주 독립을 열렬히 지지했다.

1919년 4월 국민회 중앙총회에 화교 교섭위원으로 1만 5천여 달러를 모금했다. 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방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독립금수봉위원회 훈련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인쇄업을 하던 강영각이 1946년 2월4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1세. 유족은 부인과 2남1녀(필모어, 가필드, 수산 강)로 자식들이 아직 어리다. (1946년 2월14일자 신한민보) ( 1980년대말 초기이민자 강영옥을 취재하기 위해 호놀룰루에 갔고, 마침 그 집을 방문한 강영각 부인 메리 강 을 만났다. 자녀들과 남가주 어바인에 살고 있으며, 자주 하와이를 방문한다고 말했다.)

성명 : 강영각(姜永珏, Young K Kang) / Donald Kang
훈격(연도) : 건국포장 (1997)
출생지 : 평안남도 증산
운동계열 : 미주방면
생존기간 : 1897. 3.7 ~ 1946. 2. 4

평남 강서 사람이다. 미주지역에서 국민회와 상해 임시 정부 후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공립협회와 합성협회가 발전적으로 통합한 국민회가 1910년 5월 대동보국회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탄생한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중앙 총회 아래 북미·하와이·멕시코·시베리아·만주 등 다섯 곳에 지방총회를 설치하였으며 다시 지방총회 아래 116개의 지방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강명화의 막내아들인 강영각은 남가주 포모나대학을 졸업한 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인쇄사업을 경영하는 한편 국민회에 참가하여 활동했다.

1925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임시정부후원회가 결성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투탄의거에 고무된 와히아와 지방의 한인들과 함께 임시정부 와히아와 후원회를 조직하고 독립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교육자로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는 한편, 국민보의 영문주필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안창호가 검거되자 흥사단 단원의 자격으로 석방운동에 주력하기도 했다. 정부는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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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놀룰루를 방문한 서재필 박사를 환영하는 한인대회. 한미보 발행인 강영각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서 박사 옆에 서 있다. (1925년 6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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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아몬트 한인학생양성소 앞의 한인밴드부.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강영각. (19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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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모나대학 시절의 강영각(첫째줄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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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강영각과 메리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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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교사시절 강영각과 부인(오른쪽) 그리고 찰스 강 부부, 강영옥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