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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김)혜원

강(김)혜원미주 최고의 여성 독립운동가 강(김)혜원

강혜원은 미주 최고의 여성독립운동가이다. 마지막 이민선 Doric호를 타고 1905년 6월13일 평양에서 어머니 황 마리아, 남동생 강영승과 부인 박(강)원신 그리고 막내 동생 강영옥과 함께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도착을 했다. 1913년 12월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운동가인 김성권과 이대위 목사 주례로 결혼을 했고 평생을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세아들 교육을 잘시킨 미주의 어머니로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 강혜원과 문필가이자 한학자인 남편 김성권 그리고 남동생의 부인 박(강)원신 세명이 독립유공자가 된 자랑스런 초기이민 가정으로 손꼽는다. 어머니 황 마리아는 하와이에서 대한부인구제회를 설립 했고, 초기 여성들과 함께 나라 찾는데 앞장을 섰다. 남동생 강영승은 미국에서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가 되려고 했으나 인종차별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922년 2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선출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강영승과 평양에서 결혼하고 미주에 온 남동생 부인 박(강)원신은 강혜원과 함께 1919년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단하는데 나섰고, 그후 총부단장을 지내는 등 여성 독립운동의 공을 크게 세웠다. 강혜원은 평생을 재봉틀을 사서 바느질을 하고 세탁하는 일로 돈을 벌었다. 그리고 이돈을 독립운동에 기쁜 마음으로 냈다. 자수를 잘 놓았고 대한독립을 바라면서 항상 무궁화와 한반도를 아름답게 수놓은 작품을 만들어 선물하는 등 독립운동 기금마련으로 후원을 했다. 1919년 8월4일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부단장에 선출되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65년간을 대한여자애국단과 함께 숨쉬고 함께 살았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흥사단에도 참여하는 등 폭 넓은 인맥관계를 만들어 나갔다. 흥사단 단우번호는 155번이다. 강혜원은 세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김낙은 치과 기공사로, 그리고 둘째 아들 김인은 2차대전 때 미군 군의관으로 활약했다. 막내 아들 김을은 하바드음대 학장을 지냈고 세계적인 작곡가로 평가를 받는다. 1977년 10월22일 저자와 인터뷰를 할 때 “3.1 만세후 많은 여성들이 조국에서 희생되었다는 소식을전해듣고는 우리 미주 여성들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모두가 뭉쳤지요. 그리고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단하면서 독립금을 모아서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게 되었어요”라고 말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도산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강혜원은 독립운동에 나선이후 상해 임시정부 등 모두 4만6천2백98달러를 보냈다는 친필로 쓴 명세서를 주어서 보관하고 있다. 미주이민100년사에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초기여성지도자이다. 1982년 5월31일 향년 96세로 별세. 로즈데일 묘지에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김성권과 나란히 묻혀 있다.

성명 : 강(김)혜원(康(金)惠園, Sarah(Kang) Kim)
훈격(연도) : 애국장 (1995)
운동계열 : 미주방면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생존기간 : 1885.12.21 ~ 1982. 5.31

평양 사람이다. 1904년 훗날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한 남동생 강영승 등 가족과 함께 1905년 5월 Doric선편으로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왔다. 하와이 도착 후, 가파올라 사탕농장과 에와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을 하였으며, 1912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뒤 이듬해인 1913년 12월 9일 이대위 목사의 주례로 후일 흥사단 이사장을 역임한 김성권과 결혼했다. 그 뒤 중가주 다뉴바지방 으로 이주하여 박(강)원신과 함께 포도농장에서 일하면서 여성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2일 박(강)원신, 문(한)성선, 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를 결성하여 다뉴바 지방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미주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또한 5월 18일 미주 각 지역에 산재한 한인부인회의 운동역량을 집중 강화하기 위해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와 합동발기문을 선언함으로써 각 지역 부인회의 통합을 촉진시키는 한편, 8월 2일 다뉴바 한인장로교회에서 미주내 각 여성단체인 다뉴바신한부인회, 로스앤젤리스 부인회 친애회, 새크라멘토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 한인부인회, 윌로스지방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인회 합동발기대회를개최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단했다. 대한여자애국단 창단 후 초대 총부단장으로 선임 후 동지들과 함께 매월 3달러의 단비를 모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여 외교·선전·군사 활동을 지원하였다. 국내에 각종 구호금을 수합하여 송금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1천달러, 임시정부 공복위로금으로 5백달러, 상해 독립신문사에 3백달러, 구미위원부에 군축선전비로 5백달러, 신한민보사 식자기 값으로 5백달러, 간도동포 기근구제금으로 67달러, 중국 송미령 여사의 군사위로금으로 370달러, 멕시코 한인 동포의 아바나 이주비용으로 동정금 40달러, 큐바 마딴사스 지역 한인구제금으로 55달러, 수재민 구제금 368달러, 본국 수재민 구제금 172달러, 본국 소년갱생운동에 55달러, 황온순고아원에 58달러, 2차 대전시 미군적십자사에 570달러, 로스앤젤리스 출정군인무도회에 194달러 등 총 46,298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모금 송금하여 민족운동단체를 후원했다. 1930년 이후 로스앤젤리스로 이주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의 사업과 흥사단, 대한인국민회의 민족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1940년 다시 대한여자애국단 제8대 총부단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와 국민회 재정을 적극 원조하는 한편, 미주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조국의 독립운동에 일평생을 바쳤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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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과 대한여자애국단 원로단 우들. 뒷줄 오른쪽부터 한시대 부인 루이스 한, 한사람 건너 강혜원, 한사람 건너 임인자, 송상대 부인, 미세스 한앞줄 왼쪽 도산 부인 이혜련 여사, 한시대 어머니 문(한)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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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은 1919년 8월5일 다뉴바에서 창립한 대한여자애국단 초 대 총부단장으로 선출되었다. 남편과 둘째아들 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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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과 김성권은 1913년 12월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대위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